조선족은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사이에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우리 동포요 민족이다. 조선족이라고 불리게 된 한인의 만주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36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은 북경에 천도하여 청나라를 세웠다. 청나라는 백두산과 두만강이 있는 만주 일대를 청나라의 성지로 선포하고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산동, 하북, 하남 일대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새로운 토지에 대한 수요가 생기자 1885년 만주로의 이주를 허용하고 한족과 더불어 조선족도 이주하게 되었다.
200년 동안의 만주 이주 금지 정책 중에도 조선족은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형 이주에서, 봄에 이주를 해서 가을에 돌아오는 계절형 이주를 감행했다. 특히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걸쳐 계속된 재해와 흉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비옥한 간도 지방으로의 이주가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한민족의 해외 이주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급증했고, 동양척식회사의 설립으로 조선의 곡식은 일본제국주의를 배 불리는데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1910년 10만 명이던 만주 일대의 조선족 인구는 1930년에는 60만명으로 늘어났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를 대륙 침략의 보급기지로 활용하기 위해서 한인을 대거 이주시켜서 1945년에는 조선족 인구가 145만명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공산화 과정 속에서 조선족은 큰 변화를 겪는데 국민당 정부가 한인을 한교라 부르며 한국으로의 이주를 종용한 반면 중국 공산당은 그들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대우해 주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족은 6만명 이상이 참전하여 3500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이런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신중국 정부는 조선족들에게 공민증을 부여했다. 그리고 1949년에 조선족은 소수민족 처음으로 연변대학을 설립했고, 195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설립하게 되었다.
조선족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초기에는 우호적이었지만 1956년부터 20년간 지속된 중국의 개혁정책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는다. 그 절정은 1968년의 문화대학명이다. 이름과 달리 이 혁명 운동은 반문화적이고, 반 인류적인 운동이었다. 지식인과 학자, 기술자를 대거 숙청하고, 학교를 폐교하고 소수민족의 문화를 말살했다. 조선족 역시 이 과정에서 지식인 약 3000명이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항일운동과 중국해방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연변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까지 숙청을 당했다.
조선족은 생존전략이 필요했다. 그것은 중국 중앙 정부의 지시에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전역이 피폐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자치구는 상대적으로 견실한 성장을 이룬 것과 산아제한 정책에 순응하여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인 것도 이런 조선족 생존 전략의 결과였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3번째로 큰 소수 민족이다. 소수 민족 가운데 장족, 만주족, 회족과 같이 한족에 동화된 민족이 있는 반면에 위그루족과 티베트족과 같이 독특한 민족성을 유지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 조선족은 강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지만 중국 사회에 잘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8%에 불과하지만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국방과 경제에 있어 소수민족 문제가 핵심이 되는 이유이다. 중국의 과거 왕조는 늘 소수민족의 침략으로 수난을 겪었으며 소수 민족이 차지하고 있는 지하자원이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다원일체’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요약한 말이다. 소수민족의 다양성은 인정하면서도 정치 권력은 공산당 단일체제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큰 것은 틀어쥐고 작은 것은 허용하는 방법을 통해서 순리대로 중국을 한족화 시키려 하고 있다. 권력의 핵심자리는 결코 소수민족에게 주지 않으며 경제 개발의 열매는 한족이 차지하고 상대적으로 미개발과 환경파괴는 소수민족이 떠안고 있는 구조다.
조선족은 모국과 인접해 있는 과계민족이면서 내몽고에 이어 두번째로 민족자치구역을 형성한 민족이다. 중국 내 20개 과계민족(중국국경과 맞대고 있는 나라에 자신들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존재하는 소수민족) 가운데 한국처럼 모국이 강한 소수민족은 조선족이 유일하다. 이것은 1994년 티베트, 위구르, 몽고, 조선족을 중국의 안정을 해치는 나라로 분류한 이유이기도 하다. 1998년 한국정부가 < 재외동포 출입국 및 법적지유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여 재외동포들의 자유로운 출입국을 보장했을 때 중국이 강력하게 반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조선족은 재외동포 법률에서 제외되어 있다.
중국의 조선족 정책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1920~1930년대로 해방전쟁이 한창 일 때 중국은 조선족의 활용가치를 높이 샀다. 조선족들에게 토지 소유권과거주권을 줌으로써 소수민족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했다.
둘째, 1930~1945년까지로 항일 전쟁의 승리에서 조선족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이 때 조선족은 호적이 있는 사람들을 공민으로, 호적이 없는 사람들을 교민으로 불렀다.
조선족이 항일 운동과 한국 전쟁당시 중국과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도 모두 토지소유권과 관계가 있다. 중국정부는 모든 인민들에게 평등한 토지 분배를 약속했고 실천하여 흑룡강성에 4만가구가 5만 헥타르, 연변에 9만 가구가 12만 헥타르를 분배 받았다.
조선족의 분포는 벼농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1848년 길림성 훈강에서 실험적으로 벼를 재배했고 1933년에는 벼농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흑룡강성에서도 벼 재배에 성공했다.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족 마을의 형성배경은 자발적인 이주도 있지만 일본의 지배하에 강제로 만주로 이주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만주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만선척식 주식회사’ 설립하여 조선농민들을 동북아 39개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특이한 점은 연변 지역은 함경도 주민들이 이주하고, 요녕성은 평안도 주민들이 주로 이주했다. 또한 흑룡강성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주미들이 이주했는데, 경상도 마을인 안도현과 장흥항의 새마을들이, 전라도 마을에는 삼도향고 남도촌이 그리고 충청 마을에는 남수진과 정암촌이 형성되었다.
이런 마을들이 상당 기간 동안 유지 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 정부가 추진한 호적제도 때문이었다. 호적제도는 중국 국민들의 이동을 사실상 통제한 제도였기에 이 제도가 실시되는 동안 조선족은 강한 결집력을 갖춘 민족 공동체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제도의 변화와 경제 개발로 인해 농촌 주민들은 북경, 상해, 대련, 청도, 광주, 심천 등 연해지역에까지 많이 이주했다. 현재 조선족은 러시아, 일본, 한국 등 가까운 나라는 물론,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 까지 진출해 생활하고 있다. 2013년 출입국 외국인정책통계연보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국적 한인동포는 50만명을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