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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근로자 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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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광부 파독의 배경

한국 정부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기술도 필요했다. 한국전쟁이후 나라는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직후 계속되는 미국의 무상원조도 1960년대가 되자 시들어해 졌다. 한국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사회간접시설과 기간산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에 대한 투자자금과 기술이 절실했다.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전환할 그 때, 유럽에서는 ‘라인강의 기적’이 한창 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놀라울 정도의 부흥을 이루었다. 1960년 독일은 이미 완전고용상태였고, 노동력은 모자랐다. 그 동안 서독은 부족한 노동력을 동독으로부터 제공 받았는데, 1961년부터 인력 공급이 중단되었다.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서독은 ‘돈벌이’를 바라는 나라들로부터 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과 서독은 1961년 3월에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하고 광산기술훈련생을 받기로 한다. 목적은 독일의 광산 기술을 한국에 전수해 한국의 광산 기술을 끌어 올린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광산 노동자를 공급하는 계약이었다.

한국은 노동자들을 독일로 파견할 수 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달러가 필요했다. 국가기간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달러가 절실했다. 1974년에 서독에서 약 3.6억 달러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그 당시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근로자들 앞에서 고마움을 눈물을 쏟을 만 했다.
둘째, 실업률을 낮출 수 있었다. 높은 실업률은 사회의 불안정 요소이다. 그러나 여전히 농업 국가였던 한국은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일자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해외에서라도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셋째, 북한과 군사적 대치를 하고 있었던 한국으로서 서독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견고한 유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서독 역시 동독에 맞서 반공 노선을 구축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한국과 서독은 서로를 의지하고 협력할 수 있었다.

국가 발전의 역군들

1962년 정부가 제정한 ‘해외이민법’은 독일 파견 근로자를 위한 것이었다. 이듬 해 1963년 12월 마침내 247명이 독일행 비행기를 탐으로써 정부 주도의 첫 집단 취업이 이루어졌다. 1963년 12월부터 1966년 7월까지 1차로 모두 2,519명이 파견되었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2차 파견 때 4219명이 독일로 갔다. 1, 2차 합계 모두 7,936명이 독일로 가게 되었다.

간호사는 1950년대부터 1966년까지는 민간 주도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민간과 정부가 함께했고, 1970년부터 1976년까지는 제 1,2차 간호 협정이 체결되어 정부 주도의 시기였다. 처음은 민간 주도로 간호사 파견이 이루어졌는데 가톨릭 교회, 이종수 박사, 이수길 박사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한국과 독일의 가톨릭 교회의 협조로 1965년까지 약 870명의 간호사가 파견되었다. 이종수 박사는 독일의 감리교회와 루터교회의 협조를 얻어 한국 농어촌 의료봉사요원 양성을 목적으로 처음에는 간호학생을 파견하다가 나중에는 간호사와 보조 간호사까지 파견하게 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정부-민간 합동으로 1966년 3월에서 1969년 3월까지 이루어졌다. 세 번째 시기는 제 1,2차 간호협정에 의한 시기로 1970년~1976년까지 약 7,033명이 간호요원이 파견되었다. 지원자들은 3개월간 어학, 교양, 소양 교육을 마친 뒤 파독되었다. 해외개발공사는 간호원은 만 42세 이하, 보조간호원은 만 35세 이하로 연령제한을 하였으며 국가고시에 합격한 자여야 했다.

파독 광부의 근로조건

파독 광부들은 막장 작업을 선호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장 작업은 화약 발파, 갱도 보수와 같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보통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작업을 위해서 아침은 끓이기 쉬운 국수나 가공된 국물 봉지가 제공 되었다. 점심은 빵과 과일이 나왔다. 기숙사에 오면 한국요리, 터키 요리, 이태리 요리, 그리스 요리등 다양한 음식 냄새로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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