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첫 공식적인 관계는 1882년 외교와 통상관계 협정을 맺은 제물포 조약이었다. 그 당시 급변하는 구제 정세 가운데 청일전쟁(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1년 함경도 중심으로 한반도에 덮친 대기근은 서민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부정과 부패에 허덕이던 정부는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이는 배를 타고 한 달을 가야 하는 하와이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와이는 1830년대부터 사탕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중국에서 많은 노동자를 들여왔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이 해외 이민을 금지하자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1990년경에는 하와이 전체 노동자의 80%를 일본인들이 차지하자 처우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잦은 파업을 벌였다. 조선인들의 이주는 일본인들의 비중을 낮추려고 하는 하와이 당국의 계산된 의도였다.
호래스 알렌 선교사는 1884년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고종 황제의 신임을 얻어 조선의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렌 선교사는 그 당시 일본의 계략을 파악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저지하고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인들을 하와이로 보내고자 했다. 알렌 선교사의 노력으로 1902년에 이민원이 설립되고 대쉴러가 책임자가 되었다.
처음 이민자 모집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이민을 가면 조상들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이민을 주저하거나 포기했다. 상황이 지지부진해 지자 알렌 선교사는 인천 내리 감리교회에 있는 존슨 목사를 통해 하와이 이주가 추진된다. 이렇게 초기 한인 이민을 주도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하와이 초기 이민은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1902년 12월 12일 인천항을 떠난 101명의 한인들이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일본의 방해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모두 7,226명이 조선을 떠났다. 84%가 20대 남자였고 나머지가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이민자들은 이국에서 빠른 시기에 큰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임시 체류자의 성격이 강했다.
하와이 이민 노동자들 가운데 20대 젊은 남자들의 숫자가 일방적으로 많게 되자 곧 결혼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 대안으로 ‘사진신부’가 등장한다. 결혼을 원하는 하와이 이민 노동자들은 10년 전에 찍은 사진이나 어린 청년들의 사진을 대신 보내는 방법으로 한국에서 신붓감을 찾았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신랑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이주해 온 여성은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에 105명이 도착했다. 배 밑창에서 배 멀미를 견디며 한 달 간의 여행 끝에 도착한 신부들은 사진 속의 젊은 신랑과 만날 생각에 행복한 꿈에 젖었다. ‘사진신부’들의 모집 책들은 여행이 힘들 때면, 하와이에는 과일이 바닥에 널려 있고, 돈은 쓸 곳이 없어 쌓아만 둔다는 감언이설로 사진신부들을 속였다.
사진 속의 신랑을 만나는 날, 신부들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사진보다 15~20년은 더 나이를 먹은 중 늙은이들이었다. 사진과 실제 인물을 번갈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진 신부에게 “그 진사의 주인공이 바로 나요” 라며 신부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속았다면서 조선으로 되돌아가려는 신부들에게는 설득과 위협을 통해 하와이에 주저 앉혔다. 사진 신부들 중에 $400을 물어내고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정을 꾸린 이민 노동자들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었다. 이민 노동자들은 아침 6시부터 하루 10시간을 중노동 해야 했고, 점심시간은 겨우 30분만 주어졌다. 노동 시간 내내 일체 잡담은 금지였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채찍으로 구타를 당했다. 하루 일당 1불 25센트에 불과한 임금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의 힘이 컸다.
아내들은 새벽 5시에 출근하는 남편의 점심을 챙겼고, 빨래와 청소, 저녁 식사를 도맡았다. 적은 생활비를 아껴 친정에 돈을 보내는가 하면, 한달에 $2~3을 모아 조국의 독립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03년~1915년까지 하와이로 본토를 이주하면서 미국 본토에서 재미 한인들의 기초를 닦았다.
이 시기의 이민자는 미국 가족, 입양아, 유학생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약 4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젊은 미군들이 한국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1950~1964년까지 모두 6,000명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당시 미군과의 결혼은 결코 가족들로부터 환영 받는 일은 아니었다. 2000년 까지 약 10만 명이 미군과 결혼하여 이민을 간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2002년까지 해외입양아는 모두 15만 명으로 이중에 10만 명이 미국으로 입양을 받았다. 입양인의 수는 전체 재미한인의 5%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유학생들도 1965년까지 6,000명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갔는데 학위 취득 후 미국에 머물렀다. 미국에 거주한 이들은 후에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