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이민 모집이 이루어진 1904~1905년의 한국은 격변기 그 자체였다. 러-일 전쟁 직후에 한일 협정서(1904.2.23)가 체결되고, 6개월 후에 제 1차 한일 협약이 맺어지는 데 조선의 실제적인 외교권과 재정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또한 거듭되는 자연 재해와 관리들의 부정부패, 정부의 억압과 계속되는 가난으로 백성들은 한반도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19세기 말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으로 시작된 한반도 탈출은 하와이 이민을 거쳐 멕시코 이주로 이어졌다.
미국 하와이 이민이 1903년과 1905년 사이에 65편의 배로 7,226명이 이루어진 것에 반해, 멕시코 이민은 1,033명의 이민단이 단 한번만 나갔다. 비극은 멕시코 유카탄 이민이 멕시코 이민 브로커와 한 일본 이민 회사가 결탁한 사기극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한국인 1,033명을 태운 일포드호가 떠나고 나서야 불법 이민이 벌어진 것을 알고 그 이후 모든 해외 이민을 금지하게 된다.
한국인 1,033명을 태운 일포드호가 유카탄 반도에 상륙할 당시 멕시코는 뽀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정치가 절정에 달했을 때이다. 36년간 독재 통치 기간 중에 디아스는 백인들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멕시코로 유입되는 길을 열었다. 디아스는 독재 권력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민족 자본의 건전한 육성을 오면한 채 국내 지주와 외국 대형 자본 회사들과 결탁하여 철도, 광산, 석유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05년 3월6일 1,033명의 한국인들은 마이어스의 거짓 노예 계약에 속아 인천항을 떠난 후,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국 상선 엘보트호로 갈아타고 1905년 5월 15일, 41일 만에 멕시코 우기에 살리나 끄루스 항에 도착한다. 유타칸 주의 수도 메리다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곧바로 22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분산되어 4년 동안 계약 노동을 시작했다. 에네켄은 흔히 애니깽이라 불리며 용설란의 일종인 선인장의 이름이다. 악마의 발톱을 거꾸로 세운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식물로 멕시코 사람들은 섬유질도 뽑아내고 술도 빚고 염료도 만들었다. 또한 선인장과에 드는 열대성 식물인 에네켄은 고기잡이 할 때 쓰는 밧줄을 만드는 원료로 섬유업이 발달하기 전의 끊어지지 않는 질긴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한글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으며,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승무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5월 12일, 불법적인 노예 계약이 끝났지만 조국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귀향을 포기하고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1921년 일부가 쿠바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불법 이민에 속은 것을 깨달은 한인들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박영숙은 멕시코 한인들의 참상을 담은 편지를 한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하는데 1905년 11월 17일, 상동 감리교회로 보내진 편지는 신문에 실리게 된다. 고종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윤치호를 파견하는데, 일본의 방해와 여비 부족으로 하와이에서 귀환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 상동감리교회에서도 연의금을 모아 교인 한 명을 멕시코 시티까지 보냈으나 결국 빈손으로 귀환하고 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가 멕시코 메리다에 지방회를 세우기 위해 파견한 황사용과 방화중이 도착한 날은 1909년 4월18일이다. 2주 후에 대한인 국민회에 170명이 가입하게 되는데 그 때는 아직 노예 계약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일주일 후에 135명이 가입하여 총305명의 입회 동의서를 받고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3주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황사용과 방화중이 메리다에 오기 전에 이미 국민회를 시작할 준비가 한인 사회 내에 되어있었다. 주목할 대목은 발기인 305명과 교회를 다녔던 300명과 숫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회 창립회원 305명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메리다 국민회의 결성의 일등 공신은 8명의 광무군 출신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농장 주인에게 100빼소의 계약 위약금을 지불하고 풀려나 공동으로 김제선의 명의로 주택을 한 채 구입하게 된다. 이 집은 단순한 개인 집이 아니라 교회 이자 한인결사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발행되는 교포신문이 이 집으로 배달되었는데 그 당시 에네껜 농장에서 노예처럼 살던 한인들에게는 한국의 소식들이 철저히 차단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의 소식들은 김제선이 집에서 별 어려움 없이 받아 볼 수 있었다. 황사용과 방화중이 오기 6개월 전에 이미 교포신문은 김제신의 집에 배달되고 있었다.
한인들은 인재양성이 백년지대계임을 잘 알았다. 첫 조직은 광무군 출신의 젊은이들의 군사훈련 모임이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젊은 장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1908년부터 퇴근 후 체조, 운동, 보법, 무술을 연마했다. 메리다 주에서는 28명 규모의 승무학교를 설립했다. 멕시코 혁명 이후 이 학교는 폐지되었는데, 메리다 지방회는 다시 학무원을 설립했다. 1910년 6월 29일자 교포신문에는 신광희가 10명의 학생들을 모아 최초의 한인 소학교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916년 11월 6일에는 유카탄 반도 깜빼체 지방에서 진성학교를 설립하여 14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하는데 교장 서병두, 교감 김상옥을 모시고 저녁 5시부터 9시까지 한글과 기타과목을 가르쳤다. 해동학교는 20명 규모로 한 명 당 경비가 400~500원이 들자 135인의 유지 동맹단이 결성되어 학교를 지원했으며 개교 당일 의연금으로 800원이 모금되었다. 그러나 이후 에네껜의 침체가 계속되자 1920년 학교가 폐교되었다. 1928년 호적등본제도가 실시되고, 1930년 부터는 외국인도 멕시코 학교 입학이 가능해지자 한인학교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